-저자-
김영민
사상사 연구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브린모어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중국정치사상사 연구를 폭넓게 정리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7)와 이 책을 저본 삼아 국내 독자를 위해 내용을 크게 확장하고 새로운 문체로 다듬은 『중국정치사상사』(2021)를 출간했다. 산문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2019), 『공부란 무엇인가』(2020)를 비롯해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2021)를 펴냈다.
-출처- 교보문고 작가소개
-줄거리-
인간의 선의 없이, 희망 없이,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에 대하여
-느낀점-
자신이 던진 물건 이 꽂힌 자리에 과녁을 그리며 역시 이렇게 될 운명 이었다고 말하는 운명론적 우둔함이 아닌 삶은 원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삶의 허무의 흐름에서 살아간다는 것에대해 이야기한다.
목적의식에 대한 허무,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에 대해 '구름은 흘러갈 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처럼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스스로에 인식에 투영이라는 점과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실제로 그러한 상태가 되어가기를 바라는 저자의 말처럼 나 또한 그렇게 흘러가고 싶다.
-마음에든 글귀-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홍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p - 10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그리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내되 모든 것을 보낼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둘러 출세와 업적의 탑을 쌓는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출세한 사람도 결국에는 물러나야 한다.
p - 19
그러한 수평선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굳이 강변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기에 원한다면 당신이 무엇인가 담을 수도 있다. 인생에 정해진 의미가 없기에, 각자 원하는 의미를 인생에 담을 수 있듯이. 그래서였을까. 오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부재 혹은 없음 속에서 하느님이 인식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지전능의 하느님을 '없음'이라고 불렀다. 무엇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곧 어떤 한계와 장애를 의미하므로.
p - 43~44
춤에는 흥과 림듬이 필수다. 그뿐이랴. 막춤 아사리 판이 아니라, 사교댄스에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파트너란 합을 맞추어야 하는 존재. 파트너와 조화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정신줄을 놓되 완전히 놓지는 않아야 한다. 춤은 배우기 쉽지 않은 고난도의 예술이지만,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유희이기도 하다. 인생 행로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을 댄스 파트너로 간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의 춤' 장르에 따르면, 인생의 마지막 댄스 파트너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심신이 유연하다면, 심지어 죽음마저도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지.
p - 69
시체를 직면하는 전통은 현대에도 지속된다. 1986년 대봉한 로브 라이너 감독이 만든 영화 [스탠 바이 미]에는 실종자의 시체를 찾아 떠나는 네명의 철부지 소년이 나온다. 천신만고 끝에 소년들은 마침내 시체를 발견한다. 막상 시체를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인생이란 유한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엄연한 사실, 모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허무의 물결을 이럭저럭 헤쳐나가고 있음을 철부지들조차도 깨닫게 된 것이다.
p - 77
재즈의 핵심은 악보에 집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즐기고 궤도를 이탈해가면서 즉흥 연주를 얼마나 유연하게 해내느냐에 있다. 삶도 소울 재즈라면, 미리 정해둔 목표 따위는 임시로 그어놓은 눈금에 불과하다. 관건은 정해둔 목표의 정복이 아니라,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자기 스타일을 갖는 것이다.
선생이 되고 나서 공부를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게 하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왜 그토록 열심히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요. 오, 그런가. 이 대답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인간은 우연의 동물이며, 순간을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는 간명한 대답이었다. 삶을 연주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대답이었다.
p - 103
무엇엔가 쫓기듯 일어나 출근하고, "투자에는 나중이 없습니다."라는 문자를 받고, 주식 시황을 살펴보고, 아파트 청약 상황을 점검하다가, 치주염을 다스리기 위해 치과에 다녀오다 보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진다. 그렇게 일용할 무의미와 고통을 모두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귀가하는 인간의 등 뒤로 덧없는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입을 아무리 앙 다물어도 이빨 사이로 속절없이 흐른다. 눈물과 위로 사이를 비집고 뱀처럼 흐른다. 때가 오면 삶은 간신히 맞춘 퍼즐 조각처럼 결국 무너질 것이다. 사후에 펼쳐질 천국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모든 현대적 가치는 이 덧없는 현세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사후로 유에할 수 없으므로, 개별적 존재들이 우연 속에서 엉켜 몸부림치는 이 현세의 비빔밥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분투해야 한다. 이것이 중세가 아닌 현대를 사는 세속인에게 내려진 시간의 형벌이다.
p - 107
21세기가 되었어도 시시포스 신화는 계속된다. 끝을 모르는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늘어난 여가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는 사회를 창출하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모른다. 인간은 마침내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위를 산정에 올려다 놓고 시야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감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없어진 인간에게는 권태가 엄습하기 마련.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 시시포스는 자기가 알아서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기 시작한다. 권태를 견디기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p - 153
구름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또 언젠가는 돌아온다. 구름은 보기에 따라 솟멸하는 거 같기도 하고 영원한 거 같기도 하다. 구름에 담긴 뜻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이다. 구름 자체야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
p - 166
'지금 여기'말고, 죽고 나서 가야 할 다른 곳이 정녕 있는가?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이름으로 그러한 곳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하여도, 천국과 지옥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난 지옥을 아주 잘 알아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가까운 사람을 잃은 지옥 같은 마음 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p - 183
소식은[제서림벽]과 비슷한 취지의 말을 고시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 적도 있다. 당시는 왕안석이라는 권력자가 획일적인 고시 교과서를 만들고 그 내용에 부응하는 이들만 괄료로 뽑으려고 설칠 때였다. 1078년 소식이 서주태수로 봉직할 때, 부하인 오관이 바로 그 획일적인 시험공부에 골몰한다. 그러자 소식은 그에게[해의 비유]라는 에세이를 써준다.
장님이 해가 뭔지 몰라서 눈이 환한 이에게 해에 대해 물었다.
눈이 환한 이는 해가 쟁반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님은 쟁반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해가 뭔지 감을 잡았다.
이후 종소리를 들으면 그게 해라고 여겼다.
또 다른 눈 환한 이가 말했다.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
그러자 장님은 초를 만져보고 해가 뭔지 감을 잡았다.
이후 피리를 더듬어보고 그게 해라고 여겼다.
해, 종, 피리는 서로 매우 다른데도 그 장님은 그게 다른 줄 몰랐다.
p - 200
낙방은 낙방. 실연은 실연. 패배는 패배.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인지와 납득은 다르다. 낙방, 실연, 패배를 인지했다고 해서 마음이 곧바로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선뜻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마음이 그 불편한 현실마저 수용해냈을 때 그것이 바로 정신승리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p - 211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p - 288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p - 293
-출처- 사회평론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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